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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타(TOYOTA)




2000년 들어 창립 67주년을 맞은 토요다는 일본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로 자동차 생산대수 세계 4위인 대기업이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성공을 거둔 비결은 뛰어난 경영전략과 사원들의 단합된 힘 그리고 위기 때마다 좋은 기회를 만나 새로운 발전의 계기로 삼은 점 등이다.
90년대 들어 일본의 거품경제가 가라앉으면서 잠시 어려움을 겪었지만, 계열관계를 강화하는 등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는 중이다.
자동차왕국으로 불리는 일본의 자동차역사를 이야기할 때는 토요다를 빼놓을 수 없다.
토요다는 일본 제1, 세계 4위(자동차 생산대수에서 GM, 포드에 이어 3위를 지켰지만 98년에 폴크스바겐에 밀려 4위가 되었다)의 자동차 메이커이기 때문이다.
토요다의 첫걸음은 섬유기계 제작으로 성공한 발명왕 토요다 사키치(豊田佐吉, 1869∼1930)에서 시작된다.
그의 뜻을 이어받은 아들 도요다 기이치로(豊田喜一郞, 1894∼1952)가 자동차산업에 뛰어들어 ‘세계의 토요다’로 키워냈다.
1959년 토요다의 본거지인 고로모시는 토요다의 성공을 기념해 시 이름까지 도요다로 바꾸었다.
섬유기계로 출발해 2세에서 자동차로서 50년당시는 위기였지만 한국전쟁으로 기사회생한 토요다는 1920년을 전후해 자동섬유직기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바탕으로 자동차산업에 뛰어든 창업주 토요다 사키치는 1923년 발생한 관동대지진을 겪으며 도쿄대학을 졸업하고 토요다에 입사한 아들 기이치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진 같은 재난을 당하면 철도는 쓸모 없다. 지금 움직이는 것은 자동차뿐이다. 앞으로는 틀림없이 자동차시대가 온다.
나는 평생 섬유기계만 만들었으니 너는 자동차를 만들어라.”

1920년대 일본의 자동차산업은 미국의 식민지였다. 1925년에 설립된 일본 포드와 이듬해 세워진 일본 GM은 미국차 조립생산공장으로매년 2만대 이상의 차를 생산했다.
당시 일본차는 연간 300∼400대가 생산되었을 뿐이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은 기이치로는 미국과 유럽의 자동차공장을 둘러보고 외제차를 뜯어보면서 자동차 익히기에 열중했다.
1930년 사키치가 세상을 떠나고 경영권을 이어받은 기이치로는 33년 자동차부를 만들어 자동차생산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이 무렵은 일본 자동차산업의 태동기로 일본정부의 국산차 장려정책에 따라 이스즈와 닛산의 전신인 도쿄자동차공업과 자동차제조가 주식회사로 출발했다.
기이치로는 1930년 미국차를 바탕으로 2기통 엔진을 만들었고, 2년 뒤 이 엔진을 얹은 프로토타입을 제작했으나 품질이 뒤떨어져 양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1935년 미국차를 기본으로 양산 가능성이 높은 프로토타입을 다시 만들었다. 당시 유선형의 앞선 디자인을 자랑하던 크라이슬러 에어플로를 본뜨고 4기통 3.4X 45마력 엔진을 얹어 AA형으로 불렀다. 양산모델은 이듬해 4기통 3.0X 엔진을 얹고 선보였다.
섀시와 트랜스미션은 시보레 것이었다.

1937년 토요다자동차공업(주)이 독립하면서 현재 나고야 근처의 고로모에 대형공장을 세운다. 여기서 38년부터 42년까지 시보레의 1.5톤 트럭을 생산했다.
뒤이은 중일전쟁과 2차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토요다는 군용트럭을 만들었다. AA 이후 중단된 승용차 생산은 47년에야 다시 시작한다.
1945년 일본의 2차대전 패배는 자동차산업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전후의 어려움 속에서도 도요다는 47년 승용차 SA를 내놓았으나 미국차와 경쟁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적자가 누적되어 50년 봄에는 도산 위기를 맞았고 여기에 파업사태까지 겹쳐 도요다 기이치로는 사장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또 주거래 은행은 관리하기 편하도록 도요다자동차를 제작과 판매부분을 떼어 각각 다른 회사로 운영하게 했다.

쓰러져 가던 토요다를 기사회생시킨 것은 다름 아닌 한국전쟁이었다. 미군은 한국전쟁이 장기화되자 가까운 일본에서 군용트럭을 조달하기로 하고 새로 발족한 경찰예비대와 함께 도요다에 각각 1천대씩의 트럭을 주문했다. 토요다자동차의 실질적인 창업자 기이치로가 사장직에서 물러난 지 2주만에 일어난 기적이었다.
사장 복귀설이 나돌던 기이치로는 토요다자동차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52년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카롤라로 일본 모터리제이션 이끌고 , 오일쇼크 계기로 미국시장에서 성장하여 새롭게 태어난 도요다는 55년 크라운, 57년 코로나, 61년 퍼블리카를 차례로 선보이며 기반을 잡아간다. 이 차들은 같은 이름으로 60년대 국내에서 조립 생산되어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모델이다.
크라운은 여러 번의 모델 체인지를 거쳐 지금도 토요다의 인기모델로 남아 있다. 코로나는 도요다의 입지를 굳힌 공신이었다.
데뷔 때는 1.0X 엔진을 얹었으나 64년 1.5X 엔진을 얹은 패밀리카로 자라 닛산 블루버드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된다.

60년대는 일본 자동차산업에 아주 중요한 전환기였다. 도쿄 올림픽이 열린 64년 일본은 연산 50만 대를 넘어 58만 대의 차를 만들었다.
이때 토요다 카롤라와 닛산 서니는 치열한 판매경쟁을 벌이며 일본의 모터리제이션을 이끌었는데, 사람들은 두 차의 머릿자를 따서 ‘SC전쟁’으로 불렀다.
도요다를 일본 제일의 메이커 자리에 확실하게 앉힌 카롤라는 그후 83년초 생산 1천만 대를 돌파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포드 T형(1천500만 대), 폴크스바겐 비틀(2천만 대)에 이은 세 번째 1천만 대 돌파모델이었다.
70년대 들어 토요다는 모델 수를 계속 늘려갔다. 70년에는 일본의 첫 스페셜티카 셀리카가 나왔고, 셀리카의 형제모델인 카리나로 카롤라와 코로나의 틈새를 메웠다.
토요다는 차종마다 엔진과 스타일을 조금씩 달리해 적극적인 마케팅 전략을 폈고, 70년 연간 생산 100만 대, 72년 생산누계 1천만 대를 돌파한데 이어 70년대 중반에는 일본 승용차시장의 33%를 점유했다. 이 시기에 해외시장에서도 행운이 따랐다. 도요다는 미국시장에 관심을 갖고 58년 크라운을 수출했으나 순발력과 내구성이 부족해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65년 코로나로 다시 진출을 시도했지만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 것은 68년 카롤라를 더하면서부터다.
카롤라는 미국 소형차시장에서 인기를 모았고, 73년 전세계를 덮친 오일쇼크로 작고 경제적인 차를 찾게 됨에 따라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한국전쟁에 이어 오일쇼크가 다시 토요다에게 호기를 준 것이다. 토요다는 75년 미국시장에 27만8천 대를 팔아 폴크스바겐을 앞지르고 미국내 수입차 판매1위에 올랐는데, 그 중 반 이상이 카롤라였다.

90년대는 가지치기로 모델 늘리는 전략, 계열관계는 강화, 생산능력은 줄이기로 ,미국시장에서 성공의 기틀을 마련한 토요다는 79년 2차 오일쇼크를 계기로 일본차 수입규제의 벽에 부닥친다. 토요다를 비롯한 일본 메이커들은 이에 맞서 81년부터 자율규제를 통해 미국시장을 공략하게 된다. 토요다는 일본차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88년 미국시장용 디비전 렉서스를 설립, 고급모델은 렉서스 브랜드를 붙여 판매한다.
특히 아발론은 미국에서 도요다의 이름으로 팔리는 차 중 가장 고급으로 인테리어와 장비를 철저히 미국식으로 꾸몄다.
미국 현지공장에서 생산되는 아발론은 국내에도 수입된 적이 있다. 그밖에 카롤라와 타코마 등을 생산하는 GM과의 합작공장도 84년부터 캘리포니아에서 가동하고 있다.
자동차 대중화가 이루어지면서 일본에서도 성능과 조종성을 앞세우는 퍼스널카 수요가 늘어났다. 이런 추세에 발맞춰 도요다는 80년대부터 새로운 엔진을 개발하고 MR2(84년), 셀리카(85년), 소아라(86년) 등의 새 모델을 선보였다. 또 연료분사장치, 안전 브레이크, 특수 서스펜션 등 전자장비도 크게 늘렸다.
90년대 들어서는 내수침체와 엔고의 영향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도요다는 차종 개발보다 마이너 체인지를 통한 가지치기로 모델을 늘리는 전략을 펴고, 93년에는 폴크스바겐과 아우디 판매점인 두오(DUO)를 설립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동남아에 불어닥친 IMF 한파와 일본 자동차시장의 침체로 수출과 내수가 함께 부진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자 닛산의 무게 줄이기와는 반대로 계열관계를 강화하는 공격적 전략을 펴기 시작했다.
토요다는 99년에 계열관계였던 경자동차업체 다이하쓰공업과 트럭업체 히노자동차공업에 대한 출자비율을 50% 이상 늘려 자회사화했다. 다이하쓰와 히노를 끌어들이면서 경차(토요다는 경차를 만들지 않는 메이커로 유명하다)부터 대형트럭까지 모두 갖춘 종합 자동차 그룹으로 재도약하게 되었다. 하지만 도요다는 연간 380만 대인 국내 자동차 생산능력을 99년부터 3년 동안 30만 대 정도 줄이겠다고 했다.
요코스카공장의 조립라인을 일부 폐쇄하고 본사와 모토마치공장의 라인도 축소할 방침이다.

토요다의 내수판매는 90년부터 계속 떨어졌지만 시장점유율은 40%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토요다는 미국의 렉서스를 중심으로 전세계에 38개의 해외판매망을 갖고 있다. 미국 현지에서만 연간 64만 대 정도가 팔린다.
토요다의 한국 공식수입업체인 토요다자동차는 토요다통상이 투자해 98년 3월에 설립한 TT코리아가 모태가 되었다. 토요다는 96년 6월에 진세무역을 통해 미국산 아발론을 소개한 적이 있다.
일본 메이커로는 처음으로 한국시장에 공식 지출했지만 반일감정과 미국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237대를 파는 데 그쳤다.
TT코리아는 미국시장에서 인기 높은 캠리를 들여왔지만 역시 판매가 부진했다. 한 가지 차종만으로는 한국시장을 공략하는 데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서울 강남과 전주, 두 곳뿐인 판매망도 판매에 걸림돌이었다.
새로 설립된 도요다자동차는 한국시장의 특성을 장기간에 걸쳐 면밀히 분석, 4가지 차종을 본격적으로 투입하기로 했다.
수입모델은 BMW 3시리즈의 라이벌이 될 IS200과 아발론의 수요층을 대신할 GS300, BMW 7시리즈와 벤츠 S클래스와 경쟁할 LS430, 그리고 럭셔리 SUV인 RX300이 선정되었다.
스포티 쿠페 셀리카도 곧 들여올 예정이다.
최근 GM, 포드 등 선진국의 대형업체에서 추진하고 있는 기업간 합병바람은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냉혹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생산대수 기준으로 1위 GM, 2위 포드에 이어 세계 3위였던 토요다는 98년 폴크스바겐에 3위 자리를 내준 데 이어 벤츠와 크라이슬러가 합병한 다임러크라이슬러가 최근 미쓰비시와 전략적 제휴를 선언함에 따라 5위 자리로 밀려날 위기에 있다.
그러나 토요다는 GM, 폴크스바겐 등과 차세대 저공해차 개발을 공동추진하기로 하고 인터넷 부품구매도 공동으로 추진하는 등 협력관계를 강화하면서 독자생존하는 방법을 택해 ‘빅5’ 자리는 굳건히 다질 것으로 예상된다.
휘발유 엔진과 모터를 결합한 세계 최초의 양산 하이브리드카 프리우스가 상징하듯 토요다는 양적인 크기만큼이나 높은 기술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판매의 토요다’라는 명성에 어울리는 뛰어난 마케팅이 어우러져 한국시장에서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을 일본 메이커가 될 가능성이 높다.






[사업내용]
승용차는 대중차인 1.3ℓ"Starlet"부터 대형고급차인 4.0ℓ"Century"까지 36개 차종을 생산하는 풀라인 생산 체제

1991년 최대 생산모델(594,367대)인 Carolla를 비롯하여 일본시장 판매 베스트5도 도요타가 차지하고 베스트20 모델중 11개모델을 차지하고 있다.

상용차는 6톤이하 중소형 트럭과 29인승 이하 중소형 버스등 25개 차종을 직접 생산하며, 경자동차는 "다이하쯔공업(주)"이, 대형상용차는 "히노자동차"가 각각 분담 생산한다.

[판매]
국내 판매 : 5개 계열점 311사, 영업점소 4,872개, 판매원수 11만5천명
해외 판매 : 수입업자 158사, 딜러 7,200사

[공장]
최종 조립공장 5개,부품공장 8개등 총13개 공장으로 모두 愛知縣에 소재(10개 공장은 豊田市에 위치)
국내 자회사인 다이하쯔, 히노, 도요타차체등 관련회사에 생산위탁
해외생산거점은 부품생산거점을 포함 22개국 29개 공장 보유

[특기사항]
- 80년대 전략의 최대 목표 : 국내시장에서 닛산, 혼다, 미쯔비시, 마쯔다의 추격을 피하고, 독주체제를 유지하면서 세계시장에서 포드, 닛산,푸조, 피아트,폴크스바겐,르노에 승용차 우위를 확보하고 GM을 추격한다.

- 90년대 국제화전략 목표 : 글로벌 10추진(세계 생산의 10%인 560만대 생산체제 → 일본 405만, 미국 70만, 유럽 75만대)

- 비자동차 사업부문의 매출이 18%인 1조3천억엔에 이르는 다각화를 강화하고 있으며, 이익잉여금이 12엔대에 이르는 "도요타은행"이라는 별칭이 있는 초우량기업 이다.

- 세계적으로 일본식 생산방식으로 알려져 있는 "간판방식(Just-In-Time)"을 창안 하였다.

[도요타 경영의 특징]
日經비즈니스(日) 2000.04.10

■ 위기전승 경영 : 서비스 사업 확대하고 자동차 부문 강화

지금 자동차 업계에서는 '밸류 체인'이라는 말이 일대 유행어가 되고 있다. 자동차 제조에서 물류, 판매, 판매금융, 애프터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자동차라는 상품에 관한 일련의 사업 중 어디에서 부가가치를 찾아내고 무게중심을 둘 것인지가 중시되고 있는 것이다.
美 제너럴 모터스(GM)社와 포드 모터社가 부품 부문을 분리하고 대신 인터넷 관련사업에 주력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제품제작 부문에서 주변 서비스 사업 부문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것이 시대적 추세다. 도요타자동차도 99년 말부터 2000년에 걸쳐 자동차 이외의 사업분야에 적극 진출하기 시작했다.
'DDI·KDD·IDO 합병, 도요타는 교세라에 이어 2대 주주로 부상', '결제기능이 갖춰진 도요타카드 발행', '도요타 산하의 지요다(千代田)화재해상보험과 다이도쿄(大東京)화재해상보험 합병으로 자동차 보험에 강한 손해보험사 탄생', '도요타, 연내 금융 지주회사 설립' 등 일련의 움직임은 도요타의 서비스 분야가 GM이나 포드보다 한발 앞서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요타는 과연 어떤 청사진을 갖고 있는 것일까.
자가와 다다아키(蛇川忠暉) 부사장이 얘기하는 서비스 사업의 구상은 한마디로 정보통신 네트워크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모든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통신 인프라는 DDI가 제공하고, 휴대단말기는 계열사인 덴소 등에서 만들고 있다. 고도 도로교통시스템(ITS)이 실현되면 자동차가 단말기가 될 수도 있다.
자가와 부사장은 "서비스 사업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자동차도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바일 중 하나다. 앞으로 '도요타 모터 컴퍼니'에서 '모터' 대신 '모바일'이 들어간 '도요타 모바일 컴퍼니'로 회사명을 바꾸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회사명에서 자동차가 사라지는 것이다. 주택, 정보통신 분야로 사업을 다각화했을 때부터 언젠가 그렇게 될 것이라는 소문은 있었지만 그 말이 이제 현실감을 띠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도요타가 자동차 사업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다각화 사업을 정보통신 네트워크로 연결, 크게 전진시키는 데 도요타의 목적이 있다.
한편 자동차사업과 관련해서는 현재 배기량 850cc급 엔진을 장착한 새로운 승용차를 개발중이다.
도요타의 이같은 구상은 소형자와 경자동차의 구분을 없애고 크게 보아 '작은 차'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이겠다는 전략의 일환이다. 이 경우 경차의 왕자 스즈키와 혼다기연공업(本田技硏工業)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도요타자동차의 이러한 계획은 20대 고객의 확보에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그 일환으로 도요타는 자체 경기장에서 자동차 경주 F1(포물러 원)을 개최, 스포티한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할 뿐만 아니라 혼다로부터 F1의 맹주라는 이미지를 탈환할 계획이다. 이것은 성숙시장인 자동차 시장에서 닛산에 이어 혼다까지 몰아내기 위함이다.
혼다 죽이기와 서비스 사업의 확대는 성숙산업 분야에서 살아남겠다는 도요타의 강한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일본 자동차 시장에서 도요타가 차지하고 있는 점유율은 지난 1월 43.3%, 2월 44.2%에 달했지만 "도요타자동차가 잘 팔리고 있다는 실감이 안난다. 혼다는 아직 무서운 존재고 닛산의 부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경영층부터 현장 노동자들까지 느끼고 있는 위기의식이다.
임원에서부터 현장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조직 전체가 안고 있는 위기의식의 원류는 지난 49년 도지라인(초긴축 재정정책)을 실시할 때 자금줄이 악화돼 도산 직전까지 갔던 경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은행단은 판매회사의 분리 등과 함께 인원조정이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룹의 창시자인 도요타 사키치(豊田佐吉)의 생각을 정리한 '도요타 강령 5조'에는 '가정적 분위기를 만들라'는 내용이 있어 도요타는 노동조합과 "인원조정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교환한 바 있다.
그 결과 도요타는 노동쟁의에 휩싸였고 창업자인 도요타 기이치로(豊田喜一郞)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임으로 등극한 이시다 다이조(石田退三)는 "쓸데없이 돈을 낭비하지 말라. 남는 돈은 모두 저축하라"고 강조했다. 도요타의 현재 보유자금이 2조엔에 달하는 것은 언제 경영위기에 빠질지 알 수 없으므로 최소한 2개월분의 단기채무 상환과 사원전원에 대한 퇴직금 지불을 염두에 둔 조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창업자들의 위기감도 흐려진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석유파동, 엔貨 강세, IT 혁명 등으로 위기감을 유지해왔다. 앞으로도 "자동차만이 아닌 도요타"라는 캐치플레이즈로 확장노선을 견지하면서 전사원의 위기의식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 강하고 거대해질수록 도요타의 또다른 고민거리는 커져만 가고 있다.

■ 혈연공동체 경영 : 인수방어 위한 자본의 논리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도요타에는 도요타(豊田) 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혈연적 측면이 아직 남아 있다. 그룹 창시자인 도요타 사키치의 가르침을 정리한 도요타 강령 5조에 명시된 '가족적 미풍'을 신봉하며 우직하게 지키고 있는 '혈연 공동체'인 것이다. 이것이 이 글로벌 기업그룹이 가진 또 하나의 얼굴이다.
그룹내 최고위층이 모이는 '아침의 모임'을 비롯해 그룹내에는 각종 모임들이 이뤄지고 있다. 쥬니어 모임, 고졸자의 모임, 대졸자의 모임, 여직원의 모임, 자위대 경험자의 모임 등등. 오쿠다 히로시(奧田碩) 회장은 "비공식적인 모임을 통해 공동체적인 사풍이 생겨나고 있다"며 이같은 움직임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인사도 도요타 가문의 혈연공동체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북미 지역에서 크게 성공을 거둔 고급차 브랜드 '렉서스'의 출발은 도요타 에이지(豊田英二)의 차남인 도요타 데쓰로(豊田鐵郞), 일본 시장에서 크게 히트한 소형차 브랜드 '비츠'의 개발은 셋째 아들인 도요타 슈헤이(豊田周平)가 각각 담당했다.
위기의식의 전승을 강점으로 내세워 온 이 혈연공동체의 최대 관심사는 인수방어다. 주식공개매입(TOB), 주식교환 등으로 인해 거대기업도 인수표적이 되는 오늘날 "도요타도 언제 인수당할지 알 수 없다"는 위기감이 그룹내에는 팽배해 있다.
5,000억엔 對 1조엔. 도요타자동직기의 주식 시가총액은 이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도요타 주식의 약 절반에 불과하다. 여기에 혈연공동체 붕괴 위기의 싹이 도사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룹 외부 기업이 도요타자동직기를 인수하고 同社가 보유중인 도요타 주식을 매각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이익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요타자동직기는 이전에 주식 매점 위기를 겪은 바 있다. 도요타자동직기는 도요타 주식의 5.2%를 보유한 대주주다. 약 2,700억엔을 투자해 도요타자동직기의 주식을 절반 이상 확보해 同社를 지배한다면 그 기업은 사실상 도요타의 대주주가 되는 셈이다.
청사진이 거의 완성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순수지주회사 구상'은 이러한 위기감의 발로다. 도요타 그룹 상위에 순수지주회사를 창설하고 승용차, 트럭, 부품 관련 자회사를 그 아래에 편입시키는 방법, 도요타 그룹 하위에 순수지주회사를 설립하는 방법 등이 논의되고 있다. 지주회사 산하로 들어가는 도요타자동직기 등은 관련법상 지주회사의 주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룹 산하 기업의 주식인수를 통한 간접적인 그룹의 주식 매점에 대한 불안은 사라지게 된다. 도요타는 연결납세 등 관련세제 조건이 정비되는 대로 1∼2년 내에 지주회사제 도입에 착수할 전망이다.
그러나 오쿠다 회장의 말처럼 혈연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혈연공동체 속에서 도요타 가문이 위기전승과 제품제작의 전통을 이어가는 구심력으로 남더라도 앞으로 영원히 우수한 인재를 배출해 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도요타가 내걸고 있는 자본의 논리는 '주주의 이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주회사 설립으로 공동체의 '헌법' 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도요타 그룹 경영진들은 앞으로 도요타 가문의 인재에 의지하지 않고 공동체 의식의 영속을 도모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 이질문화 흡수 경영 : 좋은 것은 흡수해 도요타式으로 변형

일본식 경영의 대표적 존재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도요타는 사실 물밑에서 최신 경영기법을 탐욕스럽게 흡수하고 있다. 원래 도요타에는 '일본식 경영'과 '구미식 경영'의 명확한 구별이 없었다. 美 펜실베니아 대학의 존 폴 맥더피 교수는 "도요타가 갖고 있는 것은 도요타式 경영뿐"이라고 분석한다.
실제로 여기저기서 구미식 경영을 흡수한 사례들을 볼 수 있다. 최신 경영지표로서 전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경제부가가치(EVA)도 그 중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방면에서 한발 앞서가고 있는 소니도 99년부터 이를 본격 도입하는 등 EVA는 일본에서도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도요타는 이미 3년전부터 투자판단을 위한 지표로 EVA를 이용하고 있다.
뛰어난 경쟁력을 갖고 있는 생산시스템 분야에서도 도요타는 세계 최강이라는 평가에 안주하지 않고 이질적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얼마 전에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미국의 명문 벤처기업 맥스저 테크놀로지社에게 생산공정의 개선 가능성 조사를 의뢰한 바 있다.
이질적 문화의 수용은 사실 도요타의 오랜 특기다. 도요타의 생산시스템이 2차대전 이전 美 포드의 방식을 흉내내는 데서 시작됐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지만, 도요타의 창업자인 도요타 기이치로가 애독했던 책이 포드 창업자인 헨리 포드가 저술한 '마이 라이프 앤 워크'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때 '기술의 닛산', '판매의 도요타'라는 평가가 있었던 것처럼 도요타는 기술자 확보 등에서 오랫동안 후진기업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지 못했다. 우수한 학생들은 긴자(銀座)에 본사를 둔 닛산자동차에 지원했으며, 중앙관료들은 같은 도쿄대학 출신들이 많이 모여있는 닛산에 기꺼이 정보를 제공했다. 이같은 갭을 메우기 위해 도요타 기이치로는 외부 인재의 등용과 사원의 해외유학을 추진해 '이질적 문화'로 핸디캡을 만회하려 했던 것이다.
도요타는 이질적 존재를 받아들이는 데 충분한 시간을 들이고 있다.
면밀히 관찰하고 준비한 후에야 이를 수용하는데, 그것은 이질적 존재를 도요타式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그룹 창시자이며 발명왕인 도요타 사키치는 '발명일기'에서 이 '침울지둔(沈鬱遲鈍)'의 철학을 설파했고 아들인 기이치로가 이를 이어받았다.
그 전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통신사업분야에서는 NTT의 대항세력 결집을 위해 15년이라는 시간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도요타도 정보통신 등 신규사업의 확대를 지향하고 있는 이상 인터넷 시대의 '지둔(遲鈍)'은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 합리편집증 경영 : 전사원이 문제해결 중독증

부사장인 이케부치 고스케(池 浩介)가 '도요타의 코어 컨피턴스'라고 단언하는 생산방식은 이제 생산부문에서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됐다. 그러나 99년 가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이 발행하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게재된 도요타생산방식에 관한 연구논문에는 "지금까지 도요타 생산방식을 채용하려 했던 기업은 많았다. 그러나 그 도입에 성공한 기업은 거의 없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자동차 메이커의 생산방식 연구부문의 일인자인 도쿄대학 경제학부의 후지모토 다카히로(藤本隆宏) 교수는 도요타 생산방식의 지도자로부터 "도요타 생산방식의 강점은 무엇인가. 초급자는 재고가 적다는 점을 꼽는다. 중급자는 문제를 찾아내 생산성 향상 및 품질향상을 강제하는 메커니즘을 지적한다. 그러나 상급자들은 문제를 찾아내 해결하는 작업을 거듭하는 동안 문제가 없는 상황에 불안을 느껴 모든 직원이 열심히 문제를 찾기 시작한다는 점이라고 얘기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후지모토 교수는 "수만명의 사원들이 이른바 문제해결 중독증에 걸려있는 상태라는 점이 바로 도요타의 장점"이라고 말한다.
도요타 생산방식은 생산부문의 효율화 뿐만 아니라 판매, 개발 등과 같은 여러 부문의 효율화에도 이용되고 있다. 96년 1월에는 유통과 판매부문의 생산성을 높이고 리드타임을 단축하기 위해 국내 영업부문 안에 업무개선 지원실이라는 부서가 발족됐다. 업무개선 지원실은 우선 중고차 부문의 현금흐름을 효율화하기 위해 딜러들이 인수한 중고차에 대한 정보를 정보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딜러들에게도 공개했다. 이것이 발전해 신규 자동차와 중고차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제공하는 'Gazoo'로 이어졌던 것이다.
신차개발기간 13개월. 지난 2월 시판된 소형 왜건형 자동차 'bB'가 달성한 경이적 기록이다. 그 비밀은 개발부문에 도입한 새로운 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설계부서를 중심으로 생산기술, 구매, 부품 메이커의 기술자 약 50명이 한 컴퓨터에 저장된 설계도면을 보면서 공동설계를 추진해 도면의 완성도를 높였다.
도요타 생산방식은 공정 과정에서 품질을 높임으로써 불량품 발생률의 억제를 지향한다. 위의 설계작업은 이러한 생산방식을 개발부문에 적용한 것이다. 그 결과 bB 시험제작 차를 만들지 않고 컴퓨터 상에서 모든 설계가 끝났다. 개발기간을 단축할 수 있었던 것은 최초 개발 단계에서 완성도 높은 도면을 만들자는 발상의 힘이었다.
이처럼 도요타 생산방식은 경영효율화를 위한 방법으로 사내 각 부문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생산부문에서 나타난 것처럼 도요타만의 강점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사원들의 편집광적인 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업분야가 글로벌하게 또는 주변분야로 확산되면서 도요타의 인재들도 필연적으로 다양화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집광적인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지 여부가 관건이다. 도요타 생산시스템이 '도요타 경영시스템'으로 승화될 수 있을지 여부는 어디까지나 '사람'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 인간중심 경영 :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난다

美 켄터키州에 위치한 도요타 서플라이어 서포트 센터(TSSC)에는 경영자문을 구하는 미국인 경영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오고 있다. 여기는 美日 자동차 마찰이 종식되던 지난 92년 도요타측이 미국에서 自社의 생산방식을 보급시키기 위해 개설한 곳이다.
센터의 장을 맡고 있는 오바 히로시(大庭元) 도요타 모터 매뉴팩처링 노스 아메리카社 부사장은 "도요타 프로덕션 시스템(TPS)을 배우기 전에 공장의 생산효율이 올라 잉여인원이 생기더라도 결코 인원감축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달라"고 강조한다. "성공적인 도입을 위해서는 TPS를 단순한 생산성 향상 시스템이 아닌 사람을 육성하고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체계적인 철학으로 생각해 달라"는 것이 그의 얘기다.
"작업은 누구나 똑같은 동작으로 가능하도록 철저하게 평준화하라", "작업 시점에서 품질을 확인해 불량품이 다음 공정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고 불량품이 나오면 라인을 세워 다시 만들라"는 오바 부사장은 "작업 개선의 기회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다면 작업자의 의욕은 크게 높아진다. 자발적으로 보다 좋은 제품을 추구하는 인재가 많은 회사는 강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의 발언은 자동차 업계의 일본대표로서 외국자본의 공세에도 흔들리지 않는 도요타의 비밀을 상징하는 것이다. 앞에서 얘기한 위기감의 전승, 혈연공동체 의식에 가까운 팀워크, 외부의 새로운 생각들을 흡수하려는 열의, 편집광적인 합리화 노력 등은 사람을 지키고 키우고 활용함으로써 완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요타 본사에는 이런 철학을 그룹 전체에 보급시키기 위한 '생산조사부'라는 조직이 있다. 이 'TPS敎의 총본산'을 만든 주인공은 도요타 자동차 공업의 전임 부사장인 오노(大野耐一)다. 현재 도요타자동차 사장인 조 후지오도 오노 전임 부사장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직계 제자다.
도요타 상점의 문을 연 1895년부터 헤아리면 도요타는 이미 100년이 넘은 기업이다. 현존하는 일본 국내의 100년 기업 중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이 된 곳은 도요타뿐이다. 그 도요타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도요타 특히 현장 직원들 사이에는 근면·성실이라는 고색창연한 개념을 미덕으로 삼는 정신이 남아 있다. 이 일본적인 정신은 도요타의 해외 현지법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근면·성실이라는 기질은 일본인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통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고 있다.
기업은 도구에 불과하며 이것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다. 사원 하나하나가 근면과 성실을 지향하면 기업은 강해지고 영속도 가능해진다. 100년 기업은 경영진과 사원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실현할 수 있는 세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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